교토삼굴

초계(草溪) |

狡兎三窟

학력만이 유일한 표준이 된 한국사회의 성공 잣대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큰 부담이다. 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지 않고 성적만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기업의 문화가 변하지 않는 한, 명문대를 향한 부모와 학생의 투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개성이 빛을 발하는 사회가 도래했다고 많은 사람이 믿는다. 하지만, 이 사회는 아직도 만가지 조건의 슈퍼맨을 원한다.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는 필수다. 명문대 학력과 A+ 학점을 원하고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논술도 잘해야 한다. 대부분 평생 써먹지 못할 미적분도 풀어야 한다. 대학합격, 취직 후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까지 이 시대의 청춘들과 기성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실력을 갖춰야 한다. 준비해야 한다.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숨을 굴을 파 놓는다고 한다.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교토삼굴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기(史記)》〈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서 유래한 ‘교토삼굴(狡兎三窟)’의 고사를 통해 우리 각자가 준비해야 할 세 개의 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각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짚어보기를 바란다.

풍환(馮驩)은 제(齊)나라의 재상(宰相)인 맹상군의 식객(食客)이었다. 그는 원래 거지였는데 맹상군이 식객을 좋아한다는 말에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왔던 자다. 맹상군은 그의 몰골이 하도 우스워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받아주었다.

맹상군은 시호 또는 봉호(封號)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 제나라의 공족이며, 전국시대 말기의 ‘사군’의 한 사람이었다. 선왕(宣王)의 서제(庶弟)인 아버지의 뒤를 이은 다음,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그 명성과 실력을 과시하였다. 맹상군은 거지 몰골의 풍환을 받아들였다. 그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는지 아니면 식객을 워낙 좋아하고 돈이 많아 자기를 찾는 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맹상군과 같은 기업의 사장이 없다. 기업은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펙을 본다. 채용할 직원이 기업을 먹여 살릴 만한 능력을 가졌는지 꼼꼼히 체크한다. 학벌과 학점, 영어, 중국어 급수는 물론 미국과 중국에 출장 보냈을 때 소통에 문제가 없는 언어구사 능력까지 점검한다. 심지어 사회활동에 문제가 없는지 대인관계까지 본다. 관상쟁이가 면접할 때 참가하여 관상을 살피는 경우도 있다. 기업은 절대로 먹기만 하는 직원, 즉 식객(食客)을 좋아하지 않는다. 철저히 기업이 필요로 하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그는 괴짜였다. 맹상군은 그를 3등 숙소(宿所)에 배치했는데 고기 반찬이 없다고 늘 투덜댔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다. 이번에는 수레가 없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1등 숙소로 옮겨 주자 그럴 듯한 집이 없다며 투덜댔다. 그는 끊임없이 좋은 것을 요구했다.

풍환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었을까?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에 응대하여 일어섰을 때 후대의 사람들이 “용이 몸을 일으켰다.”라고 평가했듯이 풍환 역시 맹상군을 도와 시대를 풍미할 만한 인재였을까? 그는 분명히 맹상군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풍환은 짚신을 신고 먼 길을 걸어 맹상군을 찾았고, 그가 자신의 주군이 될 만큼 그릇이 넓은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좋은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즉,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인재는 말하지 않아도 그 실력이 드러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고를 수 있다.

당시 맹상군은 산동성(山東省) 동남지방 설(薛)에 1만 호의 식읍을 가지고 있었다. 3천 명의 식객을 부양하기 위해 식읍 주민들에게 사채를 하고 있었는데 도무지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누구를 보내 독촉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1년간 무위도식(無爲徒食)으로 일관(一貫)했던 풍환이 자청했으므로 그를 보내기로 했다. 출발할 때 그는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무엇이든 좋소. 여기에 부족한 것을 부탁하오.”라고 대답하였다.

풍환이 1년간 무위도식하게 내버려두었던 맹상군도 대단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식객 노릇을 한 풍환에게도 비범함이 돋보인다. 풍환은 때를 기다렸던 것 같다. 인재에게는 반드시 때가 온다. 세상은 인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풍환은 1년 간을 그냥 놀았던 것이 아니라 풍상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빚을 받고 나면 무엇을 사올까요?” 라고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왜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 역시 풍환이 과연 무엇을 사올 것인지 궁금했던 것일까? 인재는 세상을 다르게 본다. 명마는 명장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설에 당도한 풍환은 빚진 사람들을 모아서 차용증을 하나하나 점검한 후 이자만 해도 10만 전을 받았다. 예상 외의 좋은 결과였다. 징수가 끝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맹상군은 여러분의 상환 노력을 어여삐 보고 모든 채무를 면제하라고 나에게 분부하셨소.” 그리고는 모아 놓았던 차용증 더미에 불을 질렀다. 차용증은 모두 재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의 처사에 감격해 마지 않았다.

실력을 갖춘 자만이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다. 풍환은 차용증을 태워버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맹상군에 대한 그의 계획에 목숨을 걸만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설에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선생은 무엇을 사오셨는가?” 하고 물어 보았다. 이때 풍환이 말하기를 “차시풍환왈 군지부족즉은의야 이소차서위군매은의래(此時馮驩曰 軍之不足則恩義也 以燒借書爲君賣恩義來)” 즉,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은 은혜와 의리입니다. 차용증서를 불살라 당신을 위해 돈 주고 사기 힘든 은혜와 의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맹상군은 매우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맹상군은 이자만 10만 전이 넘는 원금 차용증서를 태워버린 풍환의 행위가 훗날 자신이 숨을 수 있는 첫 번째 토끼 굴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풍환은 알고 있었다. 풍환은 맹상군이 속한 정치의 흐름을 이미 읽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몸을 일으켰지만, 자기 세대에 세상이 통일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삼국분할론을 주장하며 유비를 받들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인재의 출발은 부족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풍환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맹상군에게 은혜와 의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세상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각박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지식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순식간에 변하는 세상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면, 타인에 의해 짓눌려 살아야 한다.

1년 후 맹상군이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민왕(泯王)에게 미움을 사서 재상직에서 물러나자, 3천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풍환은 그에게 잠시 설에 가서 살라고 권유했다. 맹상군이 실의에 찬 몸을 이끌고 설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환호하며 맞이했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말했다. “선생이 전에 은혜와 의리를 샀다고 한 말뜻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소.” “교활한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狡兎三窟]. 지금 경(卿)께서는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 없이 잠)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저 뚫어드리지요.”

풍환의 첫 번째 토끼굴은 ‘은혜와 의리’였다.

그래서 그는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실현할 것이며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하는 힘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마음이 동한 위의 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하여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은 제나라의 민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아차 싶었던 민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맹상군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풍환이 위나라 혜왕을 설득하여 맹상군을 등용하도록 종용한 것은 제나라의 민왕으로 하여금 맹상군의 진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맹상군이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면 위나라 혜왕도 제나라 민왕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제 민왕을 설득,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게 만들어 선왕(先王) 때부터 전승되어 온 제기(祭器)를 종묘에 비치하도록 했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는 한 설혹 제왕의 마음이 변심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구멍이 완성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인님은 고침안면 하십시오.”

풍환은 맹상군에 대한 제 민왕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맹상군의 영지에 제 민왕의 선대의 종묘를 안치했다. 선대에 대한 예가 극진했던 고대의 예법으로 볼때 풍환의 계책은 아주 현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맹상군은 민왕에게 가치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맹상군은 재상에 재임한 수십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세가지 굴을 마련한 덕이다.

교토삼굴은 불안한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으로 완벽한 준비 뒤에는 뜻하지 않는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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