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 된다네

초계(草溪) |

明朝胡地妾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가슴 아프게 한 여인. 한(汉)나라의 궁녀인(宫女)였던 왕소군(王昭君)이 오랑캐의 첩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당나라 시인 이백은 그의 시《王昭君》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昭君拂玉鞍, (소군불옥안) 궁녀 왕소군이 옥구슬 안장 건드리듯,
上马啼红颊。(상마제홍협) 말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엔 눈물 흐르네.
今日汉宫人, (금일한궁인) 오늘까지도 한나라 궁궐 사람이더니,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 된다네.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사람이다. 기원전 52년에 남군자귀현(南郡秭归县) 보평촌(宝坪村), 즉 지금의 호북성 흥산현(兴山县) 소군촌(昭君村)에서 태어났다.

한(汉)나라의 경제(景帝) 손휴(孙休)가 재위하던 서기 260년에 자귀현(秭归县)의 북쪽 경계선이 흥산현(兴山县)이 되고 香溪(향계)가 읍의 경계선으로 정해 졌는데 한나라의 왕장(嫱), 즉 왕소군은 바로 그 남군현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을 소군의 현이라고 일컫는다.

왕소군은 타고난 미인이며 대단히 총명했다. 가야금, 기예(棋藝), 서화 등에 두루 정통했다. 그녀의 당대 제일의 미모와 재능은 香溪(향계)의 물을 따라 郡(남군)에 두루 퍼지고 경성에까지 알려졌다.

기원전 36년 한나라의 원제(元帝)는 전국에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를 선발한다는 공고를 내렸다. 후궁과 빈을 뽑기 위한 것이다. 南郡(남군)에서는 왕소군이 선발됐다. 원제(元帝)는 조서를 내려 소군이 길일을 택하여 경성에 올라 오도록 명령했다.

소군의 아버지 왕양(王穰)은 딸이 너무 어려서 요구에 따르지 못하겠다고 했으나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기원전 36년 음력 2월에 왕소군은 부모와 이별한 후 황궁의 배를 타고 향계를 떠나 장강, 한수 등을 거쳐 3개월이 걸려서 그 해 여름에 경성 장안(长安)에 도착했다.

왕소군은 입궁 후, 자기의 미모에 대한 자신감으로 궁중의 화공 모연수(毛延寿)에게 뇌물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모연수는 왕소군의 초상화를 평범하게 그린 후 얼굴에 점을 하나 찍어 추하게 그렸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황제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

기원전 33년, 북방의 흉노족 수령 호한야선우(呼韩邪单于)는 자발적으로 한나라에 와서 신하를 자청하며 화친하고 영원히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한다. 한 원제(元帝)는 후궁 비빈을 불렀고, 이에 나타난 왕소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란다. 후궁 중에 이런 미모의 비빈이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원제(元帝)는 왕소군을 보내기 싫었으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왕소군에게 비단 28,000필, 솜 16,000근, 황금 및 옥 등을 하사하고 몸소 왕소금을 장안 십여 리를 배웅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장안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말위에 앉은 채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데,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를 멈추어 떨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왕소군을 “낙안(落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또 다른 한 명인 서시의 호숫가에 비친 모습을 보고 물고기들이 움직임을 멈추다가 가라 앉았다고 하여 서시를 침어(沉鱼)라고 부른 것과 같다.

왕소군은 마필에 빼곡하게 둘러싼 채 한족과 흉노족 화친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장안(长安)을 떠나 1년이 걸려서 다음 해 여름에 고비사막의 북쪽(외몽고)에 도착한다. 왕소군은 흉노족의 성대한 환영을 받고 “흉노족에게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에서 “영호알씨(宁胡阏氏)”를 책봉 받는다.

소군이 흉노에 도착한 후 한족과 흉노족은 화친하며 편안하게 지냈다. 기원전 31년, 호한야선우(呼韩邪单于)가 사망한다. 두 사람의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伢师)는 나중에 흉노족의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된다. 호한야선우가 죽은 후 왕소군은 전반적인 정세를 고려하여 흉노족의 풍속에 따라 호한야선우(呼韩邪单于)의 맏아들 복주로선우(复株累单于) 조도막고(雕陶莫皋)와 결혼하여 두 딸을 낳는다. 맏딸은 수복거차(须卜居次)이며 둘째 딸은 당우거차(当于居次)이다.

기원전 20년, 복주로단우(复株累单于)도 죽고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절세가인 왕소군도 1년 후 33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왕소군은 지금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시 남쪽에 매장되어 있다. 그녀의 묘지는 대청산(大青山)을 등지고 황하를 끼고 있다. 일설에 의하며, 가을이 접어든 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묘지를 “청총(青冢)”이라 일컫는다 한다.

왕소군의 역사적인 의미는 그녀가 먼 북방의 오랑캐 흉노족과 화친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왕소군이 변방에 나간 후에 그녀와 그녀의 자녀 후손(后孙) 및 인척들이 한족과 흉노족의 화친과 단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옛부터 지금까지 왕소군에 대한 시가가 700여 개가 있고, 그녀와 관련한 소설, 민간고사가 40여 개 있다. 또한 왕소군 사적을 기술한 유명한 작자가 500여 명에 달하는데 고대에는 이백(李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이상은(李商隐)、채옹(蔡邕)、왕안석(王安石)、야률초재(耶律楚材) 등이 있고, 근현대에는 곽말약(郭沫若)、조옹(曹禺)、전한(田汉)、전백찬(翦伯赞)、비효통(费孝通)、로사(老舍)등이 있다.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의 첩이 된다”는 이백의 슬픈 독백이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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