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선언서

핑크공 188
2·8 독립선언 주역들이 1920년 3월 26일 도쿄형무소에서 출감한 뒤의 기념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 장영규(앞줄 맨 오른쪽), 최승만(그 왼쪽), 강종섭(뒷줄 가운데) 등 2·8 독립선언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독립기념관

현대어

모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겨레는 실로 세계 최고의 문명 민족 중 하나다

비록 어떤 때에는 중국의 정삭을 받든 적은 있었으나 이는 조선 황실과 중국 황실과의 형식적인 외교 관계에 지나지 아니하였고 조선은 늘 우리 겨레의 조선이오 한 차례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다른 민족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은 적 없도다

일본은 조선이 일본과 순치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앞장서 승인하였고 영·미·프·독·러 등 여러 나라들도 독립을 승인했을 뿐더러 이를 보전하기를 약속하였도다

한국은 그 의리에 감동하여 마음을 다잡고 여러 개혁과 국력의 충실을 꾀하였도다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안녕을 위협하니 일본은 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펼치니 동양의 평화와 한국의 독립 보전은 실로 이 동맹의 뜻과 한국은 더욱 그 호의에 감동하여 육해군의 작전상 원조는 불가능하였으나 주권의 위험까지 희생하여 가능한 온갖 의무를 다하여서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의 양대 목적을 추구하였도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씨의 중재로 러일 사이에 강화회의가 열리니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불허하고 러일 두 나라 대표자 사이에 임의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의정하였으며 일본은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 한국의 독립을 보전한다는 옛 약속을 어기고 나약한 당시 한국 황제와 그 정부를 위협하고 속여넘겨 「국력의 충실함이 족히 독립을 얻을 만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이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한국으로 하여금 직접 세계 여러 나라들과 교섭할 길을 끊고 그로 인하여 「상당한 시기까지라」는 조건으로 사법·경찰권을 빼앗고 다시 「징병령 실시까지라」는 조건으로 군대를 해산하며 민간의 무기를 압수하고 일본 군대와 헌병 경찰을 각지에 두루 두며 심지어 황궁의 경비까지 일본 경찰을 쓰고 이리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전혀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든 뒤에 꽤 사리에 밝다 일컬어지는 한국 황제를 내쫓고 황태자를 내세워 일본의 사냥개로 이른바 합병 내각을 조직하여 비밀과 무력 속에서 합병조약을 맺으니 이에 우리 겨레는 건국 이래 반만 년에 스스로를 이끌고 도와준다고 하는 우방의 군국적 야심에 희생되었도다

실로 일본은 한국에 대한 행위는 사기와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니 실상 이렇게 위대한 사기의 성공은 세계 흥망사 상에 특필할 인류의 큰 수치이자 치욕이라 하노라.

보호조약을 맺을 때에 황제와 불충한 신하가 아닌 몇몇 대신들은 모든 반항 수단을 다하였고 발표 뒤에도 모든 국민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온갖 반항을 다하였으며 사법, 경찰권의 피탈과 군대 해산 때에도 그리 하였고 합병 때에 이르러서는 손 안에 쇠붙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온갖 반항 운동을 다하다가 날랜 일본 무기에 희생된 자가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뒤 십 년 간 독립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희생된 자가 수십만이며 가혹한 헌병 정치 아래 손발과 입과 혀의 규제를 받으면서도 일찍이 독립운동이 끊긴 적이 없나니 이를 보아도 한일합병이 조선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알 수 있을지라. 이렇게 우리 겨레는 일본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 폭력 아래 우리 겨레의 의사를 거스르는 운명을 맞았으니 정의로 세계를 개조하는 요새 당연히 바로잡기를 세계에 구할 권리가 있으며 또 세계 개조에 주인되는 미국과 영국은 보호와 합병을 앞장서 승인한 까닭으로 이때에 과거의 오랜 과오를 씻을 의무가 있다 하노라.

또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 통치 정책을 보건대 합병 시의 선언을 거슬러 우리 겨레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 정복작가 피정복자에게 대하는 고대의 비인도적 정책을 써서 우리 겨레에게는 대소정권,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를 허락치 아니하며 심지어 종교의 자유, 기업의 자유까지도 적잖이 구속하며 행정 사법 경찰 등 모든 기관이 조선민족의 인권을 침해하며 공공의 이익에 우리 겨레와 일본인 사이에 우열의 차별을 두며 일본인에 비하여 열등한 교육을 실시하여서 우리 겨레로 하야금 영원히 일본인의 심부름꾼이 되게 하며 역사를 개조하여 우리 겨레의 거룩한 역사적, 민족적 전통과 위엄을 파괴하고 능욕하며 소수의 관리를 뺀 그 밖의 정부의 모든 기관과 교통, 통신, 병비 기관에 전부 혹은 대부분 일본인만 써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영원히 국가 생활의 지능과 경험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없게 하니 우리 겨레는 결코 이러한 무력과 억압을 사용한 국가 장악과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 아래에서 생존과 발전을 누릴 수 없는 지라. 그 뿐더러 원래 인구가 많은 조선에 무제한으로 이민을 장려하고 보조하여 대대로 살아온 우리 겨레는 해외로 떠돌기를 면치 않게 하여 국가의 모든 기관은 물론이요 사설의 모든 기관에까지 일본인을 써서 한편 조선인에게 직업을 잃게 하며 한편 조선인의 부를 일본으로 흘러가게 하고 상공업에서는 일본인에게는 특수한 편익을 주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산업적 발흥의 기회를 잃게 하도다. 이렇게 어떤 방면으로 보아도 우리 겨레과 일본인과의 이해를 서로 어긋나게 하며 어긋나면 그 피해를 받는 자는 우리 겨레이니 우리 겨레는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노라.

마지막에 동양 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그 위협자이던 러시아는 이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박애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중이며 중화민국도 또한 그러하며 더불어 이번 국제연맹이 실현되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라.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가장 큰 이유가 이미 소멸되었을 뿐더러 이로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 전쟁을 일으킨다 하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거슬러 동양 평화를 교란할 화근이 될지라. 우리 겨레은 정딩한 방법으로 우리 겨레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치 못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의 권리를 위하야 온갖 자유 행동을 취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유를 위하는 뜨거운 피를 흩뿌릴지니 어찌 동양 평화의 화근이 아니리오. 우리 민족은 일병이 없어라. 우리 겨레는 병력으로써 일본에게 저항할 실력이 없어라.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우리 겨레는 아득히 뛰어난 문화를 가졌고 반 만년 간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자라. 비록 많은 세월 전제 정치의 해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겨레의 오늘로 이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겨레는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지라.

이에 우리 겨레는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겨레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을 위하여 자유 행동을 취하여서 우리 겨레의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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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全朝鮮靑年獨立團은 我 二千萬 朝鮮民族을 代表하야 正義와 自由의 勝利를 得한 世界萬國의 前에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四千三百年의 長久한 歷史를 有한 吾族은 實로 世界最古 文明 民族의 一이라

비록 有時乎 支那의 正朔을 奉한 事는 有하엿으나 此는 朝鮮皇室과 支那皇室과의 形式的 外交關係에 不過하엿고 朝鮮은 恒常 吾族의 朝鮮이오 一次도 統一한 國家를 失하고 異族의 實質的 支配를 受한 事 無하도다

日本은 朝鮮이 日本과 脣齒의 關係가 有함을 自覺함이라 하야 一千八百九十五年 日靑戰爭의 結果로 日本이 韓國의 獨立을 率先承認하엿고 英·米·法·德·俄 等 諸國도 獨立을 承認할 뿐더러 此를 保全하기를 約束하엿도다

韓國은 그 恩義을 感하야 銳意로 諸般改革과 國力의 充實을 圖하엿도다

當時 俄國의 勢力이 南下하야 東洋의 平和와 韓國의 安寧을 威脅할ᄉᆡ 日本은 韓國과 攻守同盟을 締結하야 日俄戰爭을 開하니 東洋의 平和와 韓國의 獨立保全은 實로 此同盟의 主旨와 韓國은 더욱 그 好誼에 感하여 陸海軍의 作戰上 援助는 不能하엿으나 主權의 威嚴까지 犧牲하야 可能한 온갓 義武를 다하야써 東洋 平和와 韓國 獨立의 兩大目的을 追求하얏도다

及其 戰爭이 終結되고 當時 米國 大統領 루쓰별트氏의 仲裁로 日俄間에 講和會議 開設될ᄉᆡ 日本은 同盟國인 韓國의 參加를 不許하고 日俄 兩國 代表者間에 任意로 日本의 韓國에 對한 宗主權을 議定하엿으며 日本은 優越한 兵力을 待하고 韓國의 獨立을 保全한다는 舊約을 違反하야 暗弱한 當時 韓國 皇帝와 그 政府를 威脅하고 欺罔하야 「國力의 充實함이 足히 獨立을 得할 만한 時期ㅅ가지라」는 條件으로 韓國의 外交權을 奪하야 此를 日本의 保護國을 作하야 韓國으로 하야곰 直接으로 世界列國과 交涉할 道를 斷하고 因하야 「相當한 時期ㅅ가지라」는 條件으로 司法·警察權을 奪하고 更히 「徵兵令 實施ㅅ가지라」는 條件으로 軍隊를 解散하며 民間의 武器를 押收하고 日本 軍隊와 憲兵警察를 各地에 遍置하며 甚至에 皇宮의 警備ㅅ가지 日本 警察을 使用하고 如此히 하야 韓國으로 하여곰 全혀 無抵抗者를 作한 後에 多少 明哲의 稱이 有한 韓國 皇帝를 放逐하고 皇太子를 擁立하고 日本의 走狗로 所謂 合倂 內閣을 組織하야 秘密과 武力 裏에서 合倂條約을 締結하니 玆에 吾族은 建國 以來 半萬年에 自己를 指導하고 援助하노라 하는 友邦의 軍國的 野心에 犧生되엿도다

實로 日本은 韓國에 對한 行爲는 詐欺와 暴力에서 出한 것이니 實上 如此히 偉大한 詐欺의 成功은 世界興亡史上에 特筆할 人類의 大辱恥辱이라 하노라.

保護條約을 締結할 時에 皇帝와 賊臣 안인 幾個大臣들은 모든 反抗手段을 다하얏고 發表 後에도 全國民은 赤手로 可能한 온갖 反抗을 다하얏으며 司法, 警察權의 被奪과 軍隊解散時에도 然하얏고 合倂時를 當하야는 手中에 寸鐵이 無함을 不拘하고 可能한 온갓 反抗運動을 다하다가 精銳한 日本武器에 犧牲이 된 者ㅣ 不知其數며 以來 十年間 獨立을 恢復하랴는 運動으로 犧牲된 者ㅣ 數十萬이며 慘酷한 憲兵政治下에 手足과 口舌의 搭制를 受하면서도 曾히 獨立運動이 絶한 적이 업나니 此로 觀하여도 日韓合倂이 朝鮮民族의 意思가 아님을 可知할지라. 如此히 吾族은 日本軍國主義的 野心의 詐欺暴力下에 吾族의 意思에 反하는 運命을 當하얏으니 正義로 世界를 改造하는 比時에 當然히 匡正을 世界에 求할 權利가 有하며 또 世界改造에 主人되는 米와 英은 保護와 合倂을 率先承認한 理由로 此時에 過去의 舊惡을 贖할 義務가 有하다 하노라.

또 合倂 以來 日本의 朝鮮統治 政策을 보건대 合倂時의 宣言에 反하야 吾族의 幸福과 利益을 無視하고 征服者가 被征服者의게 對하는 古代의 非人道的 政策을 應用하야 吾族에게는 大小政權, 集會結社의 自由, 言論出版의 自由를 不許하며 甚至에 信敎의 自由, 企業의 自由까지도 不少히 拘束하며 行政 司法 警察 等 諸機關이 朝鮮民族의 人權을 侵害하며 公利에 吾族과 日本人間에 優劣의 差別을 設하며 日本人에 比하야 劣等한 敎育을 施하야써 吾族으로 하야곰 永遠히 日本人의 被使役者를 成하게 하며 歷史를 改造하여 吾族의 神聖한 歷史的, 民族的 傳統과 威嚴을 破壞하고 凌侮하며 小數의 官吏를 除한 外에 政府의 諸機關과 交通, 通信, 兵備 諸機關에 全部 或은 大部分 日本人만 使用하야 吾族으로 하여곰 永遠히 國家生活의 智能과 經驗을 得할 機會를 不得케 하니 吾族은 決코 如此한 武斷專制 不正不平等한 政治下에서 生存과 發展을 享受키 不能한 지라. 그ㅅ분더러 元來 人口過剩한 朝鮮에 無制限으로 移民을 奬勵하고 補助하야 土着한 吾族은 海外에 流離함을 不免하여 國家의 諸機關은 勿論이오 私設의 諸機關에까지 日本人을 使用하여 一邊 朝鮮人으로 職業을 失케 하며 一邊 朝鮮人의 富를 日本으로 流出케 하고 商工業에 日本人의게는 特殊한 便益을 與하야 朝鮮人으로 하야곰 産業的 發興의 機會를 失케 하도다. 如此히 何方面으로 觀하야도 吾族과 日本人과의 利害를 互相背馳하며 背馳하면 그 害를 受하는 者는 吾族이니 吾族은 生存의 權利를 爲하야 獨立을 主張하노라.

最後에 東洋平和의 見地로 보건대 그 威脅者이던 俄國은 이의 軍國主義的 野心을 抛棄하고 正義와 自由와 博愛를 基礎로 한 新國家를 建設하랴고 하는 中이며 中華民國도 亦然하며 兼하야 此次 國際聯盟이 實現되면 다시 軍國主義的 侵畧을 敢行할 强國이 無할 것이라. 그러할진대 韓國을 合倂한 最大理由가 이믜 消滅되얏을 ㅅ분더러 從此로 朝鮮民族이 無數한 革命亂을 起한다 하면 日本의 合倂된 韓國은 反하야 東洋平和를 攪亂할 禍源이 될지라. 吾族은 正當한 方法으로 吾族의 自由를 追求할지나 萬一 此로써 成功치 못하면 吾族은 生存의 權利를 爲하야 온갓 自由行動을 取하야 最後의 一人까지 自由를 爲하는 熱血을 濺할지니 엇지 東洋平和의 禍源이 아니리오. 吾族은 一兵이 無호라. 吾族은 兵力으로써 日本을 抵抗할 實力이 無호라. 然하나 日本이 萬一 吾族의 正當한 要求에 不應할진대 吾族은 日本에 對하야 永遠의 血戰을 宣하리라.

吾族은 久遠히 高等한 文化를 有하얏고 半萬年間 國家生活의 經驗을 有한 者ㅣ라. 비록 多年 專制政治의 害毒과 境遇의 不幸이 吾族의 今日을 致하얏다 하더라도 正義와 自由를 基礎로 한 民主主義의 上에 先進國의 範을 隨하야 新國家를 建設한 後에는 建國以來 文化와 正義와 平和를 愛護하는 吾族은 반다시 世界의 平和와 人類의 文化에 貢獻함이 有할지라.

玆에 吾族은 日本이나 或은 世界各國이 吾族에게 民族自決의 機會를 與하기를 要求하며 萬一 不然하면 吾族은 生存을 爲하야 自由行動을 取하야써 吾族의 獨立을 期成하기를 宣言하노라.

朝鮮靑年獨立團

右 代表者

崔八鏞 李琮根

金度演 宋繼白

李光洙 崔勤愚

金喆壽 金尙德

白寬洙 徐 椿

尹昌錫

決議文

一. 本團은 日韓合倂이 吾族의 自由意思에 出하지 아니하고 吾族의 生存과 發展을 威脅하고 또 東洋의 平和를 攪亂하는 原因이 된다는 理由로 獨立을 主張함.

二. 本團은 日本議會 及 政府에 朝鮮民族大會를 招集하야 該會의 決議로 吾族의 運命을 決할 機會를 與하기를 要求함.

三. 本團은 萬國講和會議에 民族自決主義를 吾族에게도 適用하게 하기를 請求함. 右 目的을 達成하기 爲하야 日本에 駐在한 各國 大公使에게 本團의 主義를 各其 政府에 傳達하기를 依賴하고 同時에 委員 二人을 萬國講和會議에 派遣함. 右 委員은 旣히 派遣한 吾族의 委員과 一致行動을 取함.

四. 前項의 要求가 失敗될 時는 吾族은 日本에 對하여 永遠의 血戰을 宣함. 此로써 生하는 慘禍는 吾族이 그 責에 任치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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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

1919년 2월 8일 동경(東京)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모두 셋이다. 첫째는 1918년 11월 만주·노령에서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 둘째는 「2·8독립선언서」, 셋째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서」이다.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특색이 있다. 동경유학생들은 이미 한말 때부터 대한흥학회를 조직하고 학회지 《대한흥학보》를 간행하여 국내에 배포하는 등 애국개화운동에 기여하였다.

1910년 망국 이후에는 조선유학생학우회·조선기독교청년회·조선학회·조선여자친목회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회원들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 조직되어 동경유학생 전원이 자동 가입되었으며, 회지 《학지광 學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 웅변·토론·강연·졸업생축하회·신입생환영회 등 모임을 열어 회원의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

재일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부터라고 하겠으나, 1918년 1월 종전을 앞두고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이 발표한 평화원칙 14조와 그 해 11월 성립된 휴전조약에서 직접적인 자극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게 되었다.

특히 1918년 12월 15일자 《저팬 애드버타이저 The Japan Advertizer》(神戶에서영국인이 발간한 영자지)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하에 재미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기사와, 12월 18일자 「약소민족들 발언권 인정을 요구」라는 기사에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동맹회의 2차 연례총회에서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등의 보도에 유학생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早稻田大學 3년)·서춘(徐椿, 東京高等師範學校 3년)·백관수(白寬洙, 正則英語學校)·이종근(李琮根, 東洋大學)·송계백(宋繼白, 早稻田大學)·김도연(金度演, 慶應大學)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이를 일본정부가 각국 대사·공사, 그리고 일본 귀족원·중의원 양의원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1월 7일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이와 같은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실행위원 중 전영택(田榮澤)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 이광수(李光洙, 早稻田大學)·김철수(金喆壽, 東京帝國大學) 등이 추가되었다. 총 11명으로 구성된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기초위원으로 백관수·김도연·이광수 등이 선출되었으나, 실제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완성된 선언서 초안 한 부는 송계백과 최근우(崔謹愚)에 의해 국내로 전해져, 중앙학교 현상윤(玄相允)·송진우(宋鎭禹)·최남선(崔南善)·최린(崔麟) 등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최팔용은 1919년 2월 7일 일문으로 된 「민족대회소집 청원서」를 동경 시바구(芝區) 고야마정(小山町)에 있는 이토인쇄소(伊藤印刷所)에서 1,000부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부(附)결의문은 국문·일문·영문 등으로 작성 되었기 때문에, 7일 밤 김희술(金熙述) 집에서 국문·일문(600부)을 등사판으로 밀고 영문은 타자를 쳤다.

이튿날 아침 10시 준비된 청원서와 선언서를 먼저 우편으로 동경주재 각국 대사관·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고, 오후 2시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600여 회원의 환호 속에 역사적인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대부분의 동경유학생 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독립선언회의에서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하였으나, 관할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장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위원 10명이 붙잡혔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미 1월에 중국으로 떠난 상태였다.

2월 12일 유학생 100여 명이 다시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 모여 이달(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독립선언서」를 재차 발표하려 하였으나 이달 등 13명이 붙잡혀 해산되고 말았다.

같은 달 23일 또 변희용(卞熙鎔)·최재우(崔在宇)·장인환(張仁煥) 등 5명이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히비야공원에서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같은 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생들은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를 결성하여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9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 359명이 귀국하였는데, 그 중 127명이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젊은 동경유학생들이 기초하여 발표한 「2·8독립선언서」는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언문은 두 가지 점에서 「3·1독립선언서」보다 의미있다고 할 것이다. 첫째, 이 선언서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한 문헌이었다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광수의 문장을 한층 다듬었으나, 문맥은 같은 것이며 “되도록 온건하게 쓰라”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2·8선언서의 과격한 표현을 대폭 연화시켰을 뿐이다.

특히 선언서 말미의 결의문 4항을 공약 3장으로 바꾼 최남선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야 하며 배타적 감정을 삼가하라”고 주장하였다. 결의문을 건의문으로 변조하였다고는 할 수는 없으나 독립을 요구한다는 「2·8독립선언서」의 강력한 의사표시가 부드럽게 표현된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둘째, 「2·8독립선언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민족의 자유를 추구한 것으로,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3·1독립선언서」에서는 단 한마디도 피의 전쟁을 언급한 일이 없으며 공약 3장 2에서, 다만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2·8독립선언은 무단통치하에 신음하는 2000만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한층 절실하게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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